2025. 9. 5. 12:58ㆍ단편집
세련된 복장의 할머니가 한 카페에 들어온다. 창밖으로 늦가을의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고, 그 빛을 받아 남색 정장의 흰 줄무늬가 은은하게 반짝였다. 굽이 높지 않은 구두가 마룻바닥에 가볍게 닿을 때마다 또각또각, 절도 있는 소리가 카페 안을 가득 채웠다. 사람들의 시선이 한순간 그녀에게 집중되었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카운터로 향했다.
“아메리카노 한 잔 주세요.”
나지막하지만 단호한 목소리. 주문을 마친 할머니는 창가 제일 안쪽 자리에 앉아 밖을 바라보았다. 오가는 사람들과 빠르게 질주하는 자동차들, 그 모든 풍경이 그녀의 눈에 박혔지만 그녀의 시선은 과거의 어떤 장소를 응시하는 듯했다. 이내 진동벨이 울리고, 갓 내린 아메리카노 한 잔이 테이블에 놓였다. 따뜻한 김이 피어오르는 컵을 두 손으로 감싸 쥐자, 할머니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
코끝을 스치는 쌉쌀한 커피 향과 함께, 그녀의 의식은 50여 년 전의 어느 날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1972년 4월, 혜화동 학림다방
밖에는 봄을 재촉하는 빗방울이 가늘게 내리고 있었다. 축축한 공기 속에서 낡은 LP판을 통해 흘러나오는 양희은의 **'아침이슬'**이 묵직하게 귓가를 파고들었다. 나는 그저 빗소리를 들으며 담담한 노랫말을 음미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다방의 문이 거칠게 열리고, 빗물에 젖은 한 남자가 다급한 표정으로 안을 살폈다. 그의 눈이 나와 마주치는 순간, 나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의 눈빛은 도망자의 것이었다.
그는 망설임 없이 내 테이블로 걸어왔다.
“부탁드립니다. 잠시만, 제 연인인 척해주십시오.”
그의 목소리는 낮고 떨렸지만, 그 속에는 결연한 무언가가 있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뒤로 다방 문이 다시 열리며 몇 명의 사복 차림 정보부 요원들이 들어왔다. 그들은 주변을 훑어보고 있었다. 나는 왠지 모를 긴장감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내 앞에 앉자, 나는 그의 손을 잡았다. 낯선 그의 손은 얼음장처럼 차가웠지만, 이상하게도 따뜻한 안도감이 느껴졌다.
최루탄 냄새에 신경이 팔린 잠깐 사이, 사복 차림의 정보과 사람들은 다방 안 사람들의 면면을 살핀 뒤 모두 밖으로 나갔다. 그들의 서슬 퍼런 눈빛이 사라지자, 그이의 어깨에서 겨우 긴장이 풀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내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고맙습니다. 선량한 학생이 끌려갈 뻔했는데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의 말에 나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선량한 학생'이라니. 방금 전 그의 손에서 느껴졌던 떨림과, 코를 찔렀던 최루탄 냄새가 그의 거짓말을 명백히 부정하고 있었다. 나는 서둘러 일어서려는 그를 붙잡았다.
"아직 나가지 마세요. 그 사람들, 한동안 이 주변에 계속 돌아다닐 거예요."
그이는 내 손길에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는 조금 전의 급박했던 표정은 지우고, 이제야 제대로 자신을 소개했다.
"저는 성대 사학과 박진무라고 합니다. 초면에 실례가 많았습니다."
"어머, 저랑 같은 학교시네요! 저는 영문과 김진실이에요."
우리는 그렇게 서로의 이름과 학과를 교환했다. 나는 그의 손에 남은 축축한 빗물과, 청자켓에 밴 희미한 최루탄 냄새를 잊지 못했다.